이 글을 쓰면서 가만히 생각 해 보니 소아알레르기연구회를 만들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고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를 창설했던 때도 불과 며칠 안 된 것 같은 데 벌써 20년이 되었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위의 두 단체를 만들 때 깊이 관여를 한 한 사람으로서 설립 당시의 배경이나 여건, 학회를 만들게 된 동기 등, 필자가 알고 있는 내용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술함으로서 우리 학회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역사를 잃어버린 국민은 죽은 국민이라고 들 말한다. 역사란 그 나라, 그 기구 또는 그 조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옛 우리선조들이 세웠던 나라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몇 가지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왕릉 하나를 발굴한 뒤에는 역사를 다시 고쳐서 써야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이렇게 하다가는 우리나라 역사를 몇 번이나 더 새로 고쳐서 써야 될까?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하는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 이조시대에 들어오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과거의 기록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조시대에 발간된 역사서는 처음 만들 때 몇 벌을 복사해서 전국각지에 분산보관 했고 군인들을 상주시켜 문서의 보관에 철저를 기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불과 몇 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학회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참 잘 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역사란 잘 기록해서 보관하지 않으면 ‘증발’ 해 버리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1. 나의 반대로 창설이 늦어진 소아알레르기연구회
당시 알레르기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이 모여서 학술적인 지식을 서로 교류하거나 친선을 도모하던 장소는 대한알레르기학회 한 곳 뿐이었다. 물론 대한소아과학회는 있었지만 소아의 알레르기만을 연구하는 별도의 모임은 없었던 시기였다. 하루는 대한알레르기학회의 모임이 있던 날 손근찬교수님이 필자에게 “우리도 소아알레르기를 연구하는 모임을 하나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의향을 물었다. 필자는 “지금 현재 상태에서 그런 모임을 만들기는 좀 이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대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동일한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도 필자는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피력하였다. 그 뒤 또다시 한 참이 지난 뒤 창립의사를 밝히셨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더 거절하기는 어려웠고 또 그동안 소아 알레르기를 연구하겠다는 의사들도 많이 늘어났으므로 소아과의사들로 구성 된 알레르기 모임을 하나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손교수님의 제안에 동의하였고 드디어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창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필자가 왜 연구회를 창립하는데 반대를 하였을까?. 당시 알레르기를 전공하는 의사들은 모두가 대한알레르기학회의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회원의 수도 많지 않았고 모임에 열성적인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어느 해인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대한알레르기학회에서 송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송년회를 보통날 개최했다가는 그나마 참석자가 더 적을 것 같아서 서울대학교에서 집담회가 끝난 뒤에 그곳 교수식당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학회장에서 누차에 걸쳐서 “송년회에 참석을 해 달라”고 몇 차례나 안내방송을 했으나 실제로 참석한 회원의 수는 단 5명에 불과했다. 강석영회장님, 이상용부회장님, 손근찬교수님, 김유영총무님 그리고 필자가 참석자의 전부였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요즘의 송년회와 비교 해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이런 상황 하에서 또 하나의 모임을 만들면 양쪽 모임 모두가 더 취약 해 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알레르기학회 회장이셨던 고 강석영 교수님도 우리가 딴 살림을 차리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하고 계셨다. 당시 대한알레르기학회에 참석하는 회원들 중 소아과 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필자가 연구회를 만드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연구회의 발족이 몇 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2. 회장을 하라는데 극구 사양했던 연구회 회장직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발족한 뒤 손교수님이 초대 회장에 취임하셨고 2대 회장으로는 정우갑 교수님이 수고를 하셨다. 그리고 3대 회장을 뽑을 때이었다. 총회가 끝나갈 무렵 회장이 차기회장을 뽑는 5명의 전형위원들을 구성해서 저녁을 먹던 식당 밖으로 나가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잘 모르겠으나 누가 와서 필자보고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전달했다.
필자가 나가서 보니 5분의 전형위원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가 나가자 “이 교수가 회장을 맡아 주셔야 되겠습니다”. 필자는 회장직을 맡기가 싫었다. 그래서 “못하겠습니다”라고 즉석에서 거절하였다. “왜요?”. 당연히 거절하는 이유를 물어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첫째로 저는 현재 우리 교실에서 research를 하기 위한 종자돈을 모금하고 있어서 다른데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그랬다. 필자는 앞으로는 research를 통해서 얻은 결과를 논문으로 쓰지 않으면 버텨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research를 하기 위한 ‘종자돈’을 모금하고 있었다. 주임교수라는 빽을 등에 업고 개원이 잘되고 교실에 관심을 지닌 교실동창들을 상대로 모금을 하고 있었다. 돈을 내라고 집에 까지 찾아갔던 일도 있었다. 그 결과 당시 돈으로 2억이 넘는 돈을 모을 수가 있었다. 연구비의 분배는 연구비 타기를 희망하는 교수들로부터 연구계획서를 받고 연구하려는 내용을 공개발표 시키면서 소아과 교수 5명, 타과 교수 5명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여 연구비를 차등지급하였다. 이런 제도는 동창들의 자율적인 기부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둘째로는 제가 방금 대한알레르기학회 초대 이사장을 끝냈는데 이보다 2등급이나 내려간 연구회장을 맡으라니 이건 곤란한 일이 아닙니까?. 사실 이 말은 너무 방자한 생각에서 나온 말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리 소아과 의사들의 학술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면 등급이 내려간들 무엇이 문제로 되겠는가?. 따라서 둘째 이유는 하지 않겠다는 그야말로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위에서 필자가 ‘초대’ 알레르기학회 이사장직을 역임 했다는 것은 필자 대에 와서 학회가 회장에서 이사장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승계되었던 것이지 필자가 대한알레르기학회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둔다.
또 2단계가 강등된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에는 정(正)학회가 있고 다음으로는 준(準)학회가 있다. 그다음 단계가 연구회이다. 현재 어떤 학술단체가 ‘정학회’로 되려고 해도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학회가 되기를 원하는 준 학회는 무수히 많아서 이를 다 정학회로 올려 주다가는 정학회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정학회의 수는 아직도 30개 전후가 되지 않나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소아과학회와 대한알레르기학회(후에 대한천식 및 알레르기 학회로 명칭변경)는 정학회이고 현재의 대한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는 준 학회이며 당시의 연구회는 임의단체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즉, 연구회는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몇 명만 모여도 만들 수가 있고 어느 누구의 승인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학술지를 꼬박꼬박 만들지 않아도 되는 대신 준 학회나 정 학회는 대한 의학회의 승인을 받고 학술지도 정기적으로 발간해야만 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대개는 연구회로 시작해서 준 학회 그리고 정학회로 up grade해 나가는 것이 관례이다.
3. 다른 일은 안 하고 ‘결제’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수락한 회장직
필자가 보기에 회장을 뽑는 전형위원회에서 회장직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 해 보였다. 거기 모인 분들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 해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몇 번이나 고사를 했는데도 필자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할 수 없이 회장을 맡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었다. 그것은 “회장이 되더라도 active하게 일은 하지 않겠다. 학회에서 올라오는 서류를 결재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엉터리 같은 조건을 그 분들은 받아 들였다. 대단히 고마운 분들이다.
또 회의장에서 새로 선출된 회장이 인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일은 하지 않고 결재만 하겠다.”고 했는데도 청중이 박수를 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마도 알레르기를 하는 분들은 심성이 착한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런 인사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필자 같았으면 “그렇게 회장을 하기 싫다면 당장 고만둬라!”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어야 옳지 않았을까?. 필자는 너무 솔직해서 항상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는 성격이라서 그렇게 말했던 것 이었다. 하여튼 필자가 잘 못 했다는 것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
4. 연구회를 ‘준학회(準學會)’로 승격시키고 학회명칭도 바꿨다
필자가 “일은 하지 않고 서류에 결재만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필자의 성격상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체질이라서 어떤 일이든 벌려야만 하였다. 또 그 때는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혈기도 왕성했던 때였다.
필자는 제일 먼저 ‘연구회’라는 제도부터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연구회란 학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순에 불과하다. 연구회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우리 ‘기관’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연구회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몇 명만 모이면 누구나 만들 수가 있는 대신 의무나 책임은 없다. 일본에는 ‘베로텍 연구회’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그 명칭은 어떻게 붙일 것인가?. 얼핏 생각하기에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로 할 것인지 아니면 ‘소아알레르기 및 임상면역학회’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만약 후자를 택했다가는 미구에 ‘소아호흡기학회’가 창립될 것이 뻔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감투’를 쓰려는 욕망이 있다. 따라서 틈만 보이면 새로운 학회를 만들려고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의 소아알레르기 호흡기학회를 둘로 나누었다고 상상 해 보라. 학문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이 되어 있어서 학문적 발전은 이룰 수가 없고 감투자리만 많이 늘어 날 것이다. 또 회원들은 회비를 2배로 내야하고 논문도 약간 바꿔서 2개로 나누어 양쪽 학회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양 쪽 학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알레르기에 호흡기를 붙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첨부문서 참조요망. 이 첨부문서는 당시 회원들에게 보냈던 공문서들이다). 임상면역학회는 본래 이 분야를 전공하는 분도 많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로 보아 그런 학회를 당장 만들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한천식 및 알레르기학회도 처음에는 알레르기학회였으나 내과에서 천식연구회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선발주자가 이름을 바꿨던 것이다.
5. 유관학회의 승인을 얻어내기가 까다로웠던 학회명칭
학회를 만드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 또 하나가 있다. 소위 유관단체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소아청소년과’가 표류하고 있는 것도 내과의 반대 때문인데 내과가 바로 유관단체이기 때문이다.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의 유관단체로 되는 과는 내과, 이비인후과 그리고 피부과이다. 이들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아야만 학회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위에 열거한 학회에서 중견구룹에 속하는 분들이 모두 대한알레르기학회에서 항상 만나는 분들이라서 이 분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큰 어려움이 없이 승인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주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 분들이 속한 학회에서 반대의사를 내는 분들이 있었으나 무마했다고 한다.
6. 학술지 간행의 어려움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나 ISSN을 받아 내는 일은 당시 우리학회의 열성적인 회원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달성할 수가 있었다.
학회라는 명칭이 붙으면 정기간행물을 발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학술지를 발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제일 급한 것은 논문을 끌어 모으는 일이었다. 논문은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학의 교수님들로부터 나오는데 소속 대학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 싣지 않으면 진급심사에서 인정하지 않는 경우, 소아과학회 학술지, 알레르기학회 학술지,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 학술지로 논문을 나누어 내다보니까 우리처럼 작은 학회에서는 논문을 얻기가 어려워 집필자들에게 전화도 걸고 직접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발간할 날자는 얼마 남지 않아 간행위원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간행위원 중 한분이 자신의 아파트로 간행위원들을 초대해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학술지를 만들 정도로 고생들을 많이 하셨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7.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
알레르기학회 회장이시었던 고 강석영 교수님이 필자보고 책을 같이 만들자고 하셨는데 이 잭은 의사용이 아니라 환자가 보아야 될 책이었다. 책의 이름은 ‘4천만의 알레르기’라고 이름까지 제시하셨다. 작고하신 후 필자가 이사장 시절에 그 유지를 받들어 동일한 이름으로 책을 발간하였다. 그런데 집필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편집과정에서 고생이 많았다.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환자용 책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발간목적은 물론 환자의 부모들에게 병에 대한 상식을 높여 주자는 목적도 있었으나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소아과와 이비인후과의 차이점, 어린 아이들이 아프면 소아과에 가야 하는 이유 등 다른 과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집필자의 수를 줄여 보았으나 역시 저자가 많았던지 편집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8. ‘강습회’를 처음으로 개최하다
필자가 일본에 갔을 때 보니까 의사들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필자도 참가 해 보니까 참으로 유익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알레르기학회 이사장 때 처음으로 정기적인 강습회를 시작하였다. 강습회는 일본식 명칭이고 지금은 보수교육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에서도 정기 보수교육을 시작하였다. 특히 학회 측에서 볼 때 이는 돈이 남는 장사였다. 예산을 집행하기가 어려웠던 당시 짭짤했던 수입은 학회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거의 모든 학회에서 보수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각 대학의 교실 단위로도 실시하고 있다. 돈 맛을 보니까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우선 너무 많은 곳에서 비슷한 제목으로 강좌를 하기 때문에 참가자가 어느 것을 들어야 할지 선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강의의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어서 개원의들에게는 개원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필자가 실제적으로 개원을 해 보면서 절실하게 느꼈던 점이다. 특히 소아과처럼 특별한 술기가 없는 과의 특성상 개원의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9. 학회 사무실이 있었으면
학회 사무실이 없으면 이사장이 바뀔 때마다 거창한 이삿짐(주로 서류뭉치)을 싸들고 이사를 다녀야 하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흔히는 이사장이 있는 대학 쪽으로 이사를 가는데 요즘은 교수들의 수가 많아서 남는 방이 없어 이사장과 사무원이 한방을 쓰기도 한다. 피차에 불편할 것이다. 이사장이 다른 데는 돈을 많이 쓰면서 차기 이사장에게 ‘남은 돈’을 이월하면서 “대과 없이 끝냈다”고 말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 다소 아껴서 쓰더라도 돈을 남겨서 이를 모아 방 한 칸이라도 장만하는 것은 어떨까? 일반인들이 주택 구입용 통장을 따로 만들고 가계대출을 받듯이 말이다. 오피스텔은 일반 아파트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다. 소아과학회나 천식 및 알레르기학회에서 사무실을 구입한 것도 과히 오래된 일은 아니며 소아과학회에서는 이번에 방 한 개를 더 구입한바가 있다.
10. 무궁한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우리 학회도 이제 20살 청년기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2007년 1월 18일
대한 소아알레르기 호흡기학회의 창립 20주년을 회원 여러분과 함께 축하하며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1) 소아알레르기연구회의 발족까지의 이야기
대한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발족되기 15년 전에 대한 알레르기학회가 1972. 11. 7.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참여한 소아과의사가 적었다. 서울의대의 문형로교수, 고려병원의 김종진박사 그리고 필자의 셋 뿐이었다.
당시 많은 의사가 알레르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고 또 알레르기질환도 적었다. 천식으로 입원하는 소아환자가 각 병원 소아과에서 1년에 몇 명에 불과하였다.
필자는 국립의료원 재직시 노르웨이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Oslo 대학소아병원에서 유학하는 동안(1971-1972) 소아알레르기에 대해 Kjell Aas교수 밑에서 처음으로 연수를 받게 되었다. 외래, 병실, 실험실을 돌며 도서관에서 알레르기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때 미국의학잡지에서 자주 C. J. Kim이라는 저자가 있어 누군가 궁금했는데 귀국해서 김종진박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귀국 후 기본이 되는 피부반응검사를 위한 항원을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을 때이다. 알레르기에 대해 많은 의사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해서 학생강의, 의사연수교육 등에서 강의 요청이 있을 때면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학회발족 후 1-2년 지나 피부반응검사를 위한 알레르겐과 치료를 위한 백신이 신광양행을 통해 수입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기영교수가 1980년 일본 Kitasato (北里) 대학에서 호흡기, 알레르기학을 연구하고 귀국후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그즈음 정용헌교수, 정우갑교수, 신동학교수 등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어서 이상일, 이혜란, 이준성, 강임주, 윤혜선, 이하백, 편복양, 김성원, 김종수 교수 등이 (회원번호순) 알레르기학회에 입회를 하고 그 후에도 많은 소아과의사가 가입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대한알레르기학회가 처음에는 썰렁했으며 부진하였으나 해가 거듭하면서 점점 그 세가 확장되어 갔으며 정기적인 월례집담회와 1년의 봄, 가을의 학술대회와 강석영회장의 노력과 열정으로 지방별로 속속 지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면서 소아과의사의 참여가 점차 많아졌다. 적지 않은 소아과의사가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알레르기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동근, 조성숙, 고영률, 이명익, 김규언, 안영민, 김광우, 오무영, 오지섭, 정지태, 이재호, 손병관, 김동수, 이수영, 현명철, 나영호, 홍수종, 정혜리교수 등이(회원번호순) 계속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소아알레르기가 성인알레르기에 비해 관심의 대상이 다르고 임상적인 차이가 있어 소아과의사들만의 토의의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구회창립에 관한 의논이 자연스럽게 몇 번 오고 가고 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상일교수가 미국 UCLA의 Heiner교수 밑에서 소아알레르기학에 관한 2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필자를 찾아와 소아알레르기에 관한 모임을 많은 사람들이 따로 가졌으면 한다고 했고 선생님께서 소아알레르기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달라는 간청이 있었다. 소아알레르기에 관한 한 현직에 있는 소아과의사로는 필자가 먼저 시작하였고 학회를 직접 운영해 본 경험은 없지만 소아과학회를 비롯한 몇몇 학회의 회무에 관여하고 있었고, 하였던 경험으로, 또한 필자도 고려 중이였던 일로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곧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함께할 사람을 찾았고 몇 번의 회합을 거치면서 명칭을 대한소아알레르기연구회(영문: Korean Society of Pediatric Allergy)로 칭하기로 하고 회칙을 다듬었다. 준비에 이상일교수와 이명익교수가 수고를 많이 해주었다.
그리하여 1987. 4. 17. 국립의료원 구내 스칸디나비안클럽에서 26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신광양행의 후원으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회장으로 손근찬(국립의료원), 부회장에 이기영(연세의대)교수, 감사에 정우갑(한림의대)교수가 선출되었다. 임원회는 운영위원회로 하였고 운영위원으로 운혜선, 김종수, 이상일(학술부장), 이준성, 고영률, 이명익(총무부장)교수 등이 선출되었는데 30대 40대가 대부분으로 젊고 운영 경험도 별로 없었으나 열의와 패기로 시작하였다. 이하백교수는 나중에 보강되었다. 운영위원은 운영상 되도록 서울에 있는 주요대학에서 선출하였으나 모든 주요대학에서 선출하지는 못했다. 창립당시 26명의 회원이던 것이 1999.3에 720명이 되었고 20년이 된 현재 회원수가 1000명을 훌쩍 넘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2) 학술대회와 외국인학자의 초청
연구회를 발족시킨 후 운영위원회가 1987. 4. 29. 처음으로 열렸고 창립기념심포지엄을 곧 개최하기로 하였다. 다른 학회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초기의 연구회의 운영은 회원의 회비만으로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대한알레르기학회의 강석영회장께서 학회발전을 위해 당시로는 거금인 30만원을 희사해 주셨고 김종진박사께서 10만원을, 필자가 10만원을 보태어 큰 도움이 되었다.
창립심포지엄은 1987. 6. 20. 롯데호텔에서 「소아알레르기」라는 주제로 중외제약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심포지엄은 연구회가 아직 일천(日淺)하여 학술대회의 명칭을 붙이지 못했지만 실제적인 제1회 학술대회인 셈이다.
제2회 심포지엄은 1987. 12. 12. 신라호텔에서 「면역과 천식」,「경구 항천식 치료제의 임상」이란 주제로 한국산도스(주)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처음으로 외국인학자를 특강에 초청하였는데 일본 Kyoto(京都)대학의 Mikawa Haruki(三河春樹)교수로 일본소아알레르기학계의 맏형격인 분이셨다. 환영연 장소에서 Kyoto대학의 교가를 기분이 좋아 부르셨고 꾸밈이라고는 없으셨던 조용한 분이었다.
창립1주년이 되던 1988년 봄부터 학술대회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춘계학회는 일반연제와 심포지엄을 다루었고 추계대회에서는 주로 심포지엄과 특강을 다루었으며 1990년부터는 대한소아과학회 추계학술대회가 끝나는 2일째 오후에 개회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88.10.5 신라호텔에서 추계학술대회가 있었는데 마침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던 해로 시기가 거의 겹쳐 있었다. 외국인 초청연자로는 영국 King's College의 Dr. C.P. Page가 「The natural course of bronchial hypereactivity」에 대해서, 미국 UCLA의 Douglas C. Heiner교수가 「Cow's milk and respiratory allergy」의 연제로, 그리고 노르웨이 Oslo대학의 Kjell Aas 교수가 「To win with a wheeze」이란 연제로 특강을 해주셨다.
Heiner교수는 milk allergy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분으로 이상일교수의 지도교수이다. 6.25 한국전쟁 때 군의관으로 참전하셨고 잘 아는 한국의사들이 많으셨다.
Kjell Aas 교수는 필자의 Oslo대학 소아병원 유학시절의 지도교수이시며 소아천식 및 알레르기센타와 연구소의 책임자로 RAST기법을 스웨덴의 Johansson교수와 함께 공동개발을 하신 분이다. 특히 Aas교수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침공에 레지스탕스로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때 한쪽 눈을 잃어 의안(義眼)인데도 의학공부를 하고 진료와 연구를 계속하셨던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1989년 추계학술대회때는 네덜란드 Groningen대학의 K. Knoll 교수와 일본 Tokyo의 국립소아병원의 Iikura Yoji(飯倉洋治)부장이 초청되었다. 그 후에도 외국인학자들이 초청되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고 특히 일본과는 후일 상호교환초청 형식을 취하여 봄에는 우리나라 소아 allergist가 일본 소아알레르기학회에, 가을에는 일본소아 allergist가 우리학회 학술대회에 초청되어 특강을 하기로 하고 현재도 그대로 계속되어 오고 있다.
외국인학자를 초청하게 되면 대개 환영연을 베풀어주는데 초대회장이었던 필자에게는 걱정이 되었다. 당시 연구회재정으로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집사람이 집으로 초대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경비는 내 몫이었으나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바깥에서 대접하는 것보다 일반가정집에서 초대 받는 것이 가장 잘 받는 대접이라는 것을 우리 부부가 해외유학시절에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초대 및 2대회장을 맡았던 4년 동안과 그 후에도 Kjell Aas교수내외, Dr. Page, K. Knoll교수내외, Iikura Yoji부장, Baba Minoru(馬場 實)박사내외, Teramichi Yoshiaki(寺道由광)부장, 佐佐木 聖교수내외, 勝呂 廣소장내외, Peter Paul van Asperen교수 등이 초대되었는데 모두 무척 좋아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국적인 맛과 멋을 느끼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989년 런던에서 열렸던 유럽호흡기학회에 가는 길에 Oslo를 들렀을 때 Kjell Aas교수내외는 우리 일행 10여명을 자기네 집으로 초대해 주셨던 일이 있었다. Peter Paul van Asperen 교수는 호주의 교수로 나중에 Perth에서 있었던 아시아소아과학회에서 알레르기 part의 좌장과 Symposiast로 필자를 초청해주기도 하였다.
(3) 색인집과 학회지의 발간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발족된지 2년 남짓 되는 동안 여섯 차례의 학술대회와 심포지엄 그리고 17회에 걸친 월례집담회를 개최하였으며 회원수도 109명에 달했다. 본 연구회의 창립을 계기로 소아알레르기에 관한 활발한 연구활동 및 적극적인 진료를 하게 되었다고 회원 스스로가 자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외국문헌과 함께 우리나라 문헌들이 자주 인용되면서 알레르기에 관련된 논문색인집의 필요성이 회원들로부터 제고(提高)되어 색인집 발간이 기획되었다. 학술부장인 이상일교수가 중심이 되었으며 조금은 의욕적으로 이르다고 생각되었으나 그대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논문의 발췌는 정병주교수가, 컴퓨터입력 및 분류는 이명익교수가 주로 맡아서 해주었고, 처음 구상부터 발간 그리고 그 후의 계획에 이르기까지 김규언, 이동근, 이준성, 이하백, 편복양교수 등이 함께 수고를 해주었다.
「알레르기 논문 색인집(1958-1988)」이 1989.12.12 대한소아알레르기연구회의 이름으로 발간된 것이다. 색인집은 알레르기학회를 중심으로 소아과, 내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안과 등 학회지 및 기타 주요학술지에 실린 알레르기에 관련된 논문을 모두 수록하려 노력하였으며 주제별로 편찬된 것이었다.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주관하여 알레르기 색인집을 발간한다는데 대해 알레르기학회내에서 잡음이 있었으나 당시 알레르기학회 회장이신 강석영교수께서 「색인집의 발간은 가뭄에 단비처럼 시의 적절한 것이며 전국 알레르기 연구자들이 환영할 것으로 믿는다」는 치사(致辭)를 보내주시고 발간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다소 문제가 없지 않으나 가까운 장래에 증보판을 냄으로서 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사실 당시 연구회로서는 역부족인 사업으로 생각하였으나 이상일교수를 비롯한 젊은 학술부원들의 의욕과 패기로 인해 회장도 이에 따르기로 하였었다. 어째든 색인집은 그런 그들의 노고의 결집이었다고 본다. 이런 일은 그 후 그들이 학회 회무를 맡아보는데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 후 20년이 가까웠으나 아직도 색인집의 증보판이 나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학술잡지는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발족된 지 4년이 된 1991. 4. 12. 창간호가 발간되었다.「소아 알레르기」이란 제명으로 제1권 제1호가 탄생하였다. 영문으로는 Reviews in Pediatric Allergy이다. 제2권 제2호가 발간된 다음 해부터는 학회명칭이 대한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영문:The Korean Academy of Pediatric Allergy and Respiratory Disease)로 개명(1993. 4. 17.)되었으며 학회지도 「대한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지」로 바꾸고 제3권 제1호부터 현재까지 제16권 제4호로 계속 되어 오고 있다.
창간호는 연구회 창립 후 4년간 다루었던 심포지엄 제목과 내용, 그리고 학술발표 연제와 초록을 전부 수록했으며 연구회의 연혁, 집담회소 식, 회칙, 회원명부 등을 함께 게재하였다.
학회지로서의 형식은 창간호 이후부터 이루어졌으며 처음에는 미숙한 것이 많아 다른 학회에 보이기 민망하였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충실해졌으며 20년이 되어오는 현재는 다른 학회지에 못지않게 발전하였다고 본다. 역대 회장, 간행이사. 각 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여러 회원들의 참여에 감사를 드린다.
(4) 韓日소아알레르기의 교류
1980년 9월 스페인 Barcelona에서 있었던 국제소아과학회에 다녀오는 길에 일본 Tokyo에서 일본알레르기학회가 있다고 해서 들은 학회장에서 강석영교수를 만나 일본 Dokkyo(獨協)대학의 Ishizaki Tatsu(石崎達)교수의 추천으로 일본알레르기학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일본알레르기학회의 정회원이 되려면 반드시 2명의 학회평의원의 추천이 있어야 하는데 두 분 모두 평의원이셨다.
이듬해 Ishizaki 교수의 초청으로 대한알레르기학회 강석영회장을 비롯한 일행 10여명이 Utsunomiya(宇都宮)에서 있었던 일본 알레르기학회에 참석하였는데 그 때 Kanagawa(神奈川)소아 병원의 소아알레르기 과장인 Teramichi Yoshiaki (寺道由광)부장을 처음으로 소개를 받았다. 일본 Yokohama(橫濱) 출신으로 Yokohama의대를 나왔으며 나와 나이와 출생지가 같고 소아과의사이며 알레르기 전공이라고 해서 그 후 친하게,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필자의 출생지가 일본 Yokohama이다. 그 후 자주 여러 번 만나게 되었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리나라 소아과의사가 그분의 도움과 편의를 더러 받은 것으로 안다. Teramichi 선생 댁에서 2번이나 숙박하여 신세를 졌던 일도 있었다. 한․일 알레르기 합동심포지엄이 2~3년마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개최되었는데 매번 함께 참석하다시피 하였으며 함께 공동좌장을 맡기도 하였었다. 대한알레르기학회와 대한소아과학회의 학술대회에서 특강을 하신 일도 있다.
일본 Tokyo에서 있는 Doai(同愛)기념병원소아과의 Baba Minoru(馬場 實)선생도 가깝게 지내던 분으로 일본국내에서 일반사람들에게도 소아알레르기의사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소아알레르기의 개척자(pioneer)라고 불리 우는 분으로 일찍 1960년대에 미국에서 알레르기학을 전공하여 귀국 후 일본에서 활발히 진료와 연구에 애쓰신 분이다. 1987년 대한알레르기학회에서 특강차 내한하셨다가 마침 우리 연구회가 창립준비중이어서 모셔다가 간담회를 가졌던 일이 있었다. 그 후 우리 연구회와 가깝게 지냈으며 1991년 연구회 추계학술대회와 1992년 대한알레르기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그리고 1989년 대한소아과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특강을 해주셨다. Baba선생교실에서 이상일교수가, 후에 김현희교수 등이 연수를 받은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Baba선생과 Teramichi부장이 우리나라 소아알레르기 의사들과 함께 설악산에 올라갔었던 일은 좋은 추억이다.
Kyto대학의 Mikawa Haruki(三河春樹)교수도 먼저 소개했지만 늘 조용하고 말씀을 적게 하셨던 분으로 일본소아알레르기의 지도적인 분이셨다.
Mikawa교수, Baba부원장, Teramichi 부장, 다음에 말하려는 Iikura교수 등은 우리나라 소아알레르기에 관해서는 늘 호의적이셨다. 이분들은 우리들의 부탁이라면 여기 저기 알아보고 대신 부탁해주고 편의를 보아주시던 분들이다. Showa(昭和)의대의 Iikura Yoji 교수는 원래 일본 Tokyo의 국립소아병원소아의료센터 알레르기연구부장을 맡으셨던 분으로 소아병원에 계실 때부터 교육과 연구에 혹독하셨던 분으로 유명하다. 교실내 회의는 진료시간이 지나서야 집담회나 발표회를 가졌고 교수와 교실원 모두 밤10시가 지나야 귀가를 했고 1년에 국내외의 의학잡지에 발표하는 논문(주로 외국잡지)이 40~50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소아병원에 계실 때 편복양교수 등 우리나라 교수들이 연수와 지도를 받았고, 일본 JAICA(국제협력기구)와 연계되어 우리나라와 일찍부터 교류가 있으셨던 분이다.
제 6차 아시아소아과학회가 1980. 3. 17. Tokyo에서 개최되었는데 소아천식의 심포지엄에서 필자를 symposiast로 초청발표토록 하여 가깝게 지냈으며 소아병원에서 강의를 하였던 일도 있었다. 우리학회에서도 Iikura교수가 특강을 했고 간담회를 가졌던 일도 있어 우리 소아알레르기교수들과 가깝게 지냈던 분이다. 필자의 집에서 초청하여 저녁대접을 네덜란드의 Knoll교수내외와 함께 하는데 풋고추가 맵게 생겼는데도 지기 싫어 억지로 생으로 먹었다가 혼이 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며 웃었던 일이 있었다. 모든 면에서 적극적인 분이셨다. 나중에 국립소아병원에서 Showa(昭和)의대로 자리를 옮겼는데 재미가 별로 없으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위암으로 일찍 타계하신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 외에도 일본소아알레르기의 대원로이신 Gunma(群馬)대학의 Matsumura Tatsuo(松村龍雄)명예교수와 알고 지냈고 Dokkyo(獨協)대학의 Ichimura Toju(市村登樹)교수, Osaka(大阪)대학의 Sasaki Sei교수, Yokohama소아알레르기센터의 Suguro Hirshi(勝呂廣)소장, Minami Fukuoka(南福岡)병원의 Nishima sankei(西間三?)원장 등은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분들로 우리학회를 도와주려고 하셨던 분들이다.
이런 일본소아알레르기의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 후 계속해서 당시 젊었던 일본의사들과 우리 후학들이 계속해서 활발히 교류하며 현재 공식적으로 한일(韓日)소아알레르기사이에 서로의 학술대회에 연자를 초청하여 발표케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동안의 교류와 노력의 결과로 생각되어 우리나라 소아알레르기의 초기에 참여하고 힘을 기울였던 우리로서는 유익했던 일로 마음에 담아 두고 싶다
(5) Epilogue
대한 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의 창립 20주년을 정말로 축하한다. 이제 성년이 된 학회로서 책임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학회는 회장제도에서 이사장제도로 바뀌었고(2005년도), 학회이름으로 「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을 첫 출판 하였다(2005.2.28). 773쪽에 달하는 방대한 교과서이다. 또 국제학회(APAPARD)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잘 치러냈다(2005.4.7-9). 또한 회원수도 1000여명에 이르는 큰 학회로 성장 하였다.
학회초대회장으로서 흐뭇한 일이며 기쁘기 그지없다. 자랑스럽다. 역대 회장과 역대임원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회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 회원들 모두 열심이고 스스로 일하는 적극적인 스타일의 사람들이다. 소아과의 세부분과중 가장 먼저 크게 발전하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동안 어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다. 창립 초기에 알레르기학회안에서 소아알레르기를 해야 한다고 타과의 의사들의 반대가 심하였으며 해체를 주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몇몇 동료 소아과의사 중에서도 그렇게 동조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강석영회장께서 우리의 뜻을 이해하시고 거금 30만원을 희사해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학회가 시작하였지만 발족 2년 후 소아알레르기학회로 정식으로 개칭키로 하고 의학회(당시에는 의협산아 분과협의회)에 등록하고 회원으로 가입하려고 했는데 임원 중 한사람이 너무 강하게 반대를 해서 포기하였던 일이 있었다. 회원수도 늘어나고 있었으며 월례집담회도 매월 계속했고 매년 춘추계학술대회가 개최되었었다. 회원들의 연구의욕도 왕성했고 발표논문도 많아지고 있었다. 충분히 가입요건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분과협의회의 의견도 호의적이었다. 그때 가입했었더라면 지금의 준회원이 아니라 정회원으로 되었었는지 모른다.
4대회장인 이기영교수가 회장취임 후 학회 이름을 연구회에서 학회로 하고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던 것은 잘 하였던 일로 생각한다. 연구회를 처음 시작할 때 호흡기가 아니라 임상면역학을 붙였으면 했는데 시대적인 흐름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1, 2대 회장을 거치면서 3대 회장은 부회장인 이기영교수가 맡기로 했는데 이교수가 대한알레르기학회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는 바람에 못하고 필자에게 계속 다시 맡아달라는 청이 있었으나 한사람이 계속 오래하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당시 감사를 맡아 보던 정우갑교수가 3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몇몇 후학들이 필자가 계속 맡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기도 하였는데 미안하게 생각한다. 대한알레르기학회처럼 초기에 한분이 너무 오래하셨던 일이 있어 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초창기였지만 계속 맡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학회는 생각해 보면 출신대학이나 소속 병원을 따지지 않고 같은 알레르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힘을 합쳐서 일했으며 선배는 후배를 아끼고 이끌어 주며 후배는 선배를 따라주며 밀어주어 오늘과 같은 화목하고 성장된 우리 학회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밖에 우리학회의 학술대회 때에는 몇 분의 원로 교수님들이 참석하시곤 했는데 학생시절의 은사님이신 서울의대 일반외과의 박길수교수님이 조용히 강의를 들으시던 모습을 자주 뵈었고, 필자의 전공의 시절의 은사님이신 이근수교수님도 참석하시어 적극적으로 질문도 하시던 모습을 기억하며 그밖에 몇 원로선생님들도 뒤에서 후원과 격려를 해주셨다. 이동기 교수님도 서울의대 학생시절의 은사님이시고 이상일 교수의 부친이신데 가끔 참석하시어 학회를 위해 걱정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던 자상하신 모습을 떠 올리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학회 창립과 학회의 성장을 위해 미력이었으나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학회가 정상궤도에 오르도록 노력했고 희생이 되더라도 후배를 도우려고 했으며 개원의를 포함해서 모든 의사가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창립 때 밑거름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그런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것으로 믿는다.
대한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 창립20주년을 다시금 축하하며 학회의 무궁한 발전과 하나님의 축복이 회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며 끝을 맺는다.
2007년 3월
소아 알레르기 호흡기 학회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며 학회 창립 회고담을 쓰게 되어 영광 입니다.
이제 20주년을 맞이한 소아알레르기 호흡기 학회의 모습은 참으로 잘 자란 아름두리 나무를 바라보는 느낌이며, 그동안 학회 발전을 위해 수고 많으셨던 회원 여러분과 이사님들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창립 당시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덧 시간은 훌쩍 20년의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1984년 일본 교도에서 있었던 일본 알레르기 학회에 대한 알레르기 초대 회장님이셨던 고 강석영 교수님과 내과 교수님들(그 당시에는 대한 알레르기 학회 회원과 평의원의 대부분이 내과 교수님들이었음)과 소아과로는 손근찬, 이기영, 정우갑과 신동학교수님과 제가 참석하였었습니다. 그 때 일본에는 이미 일본 알레르기 학회와 소아 알레르기 학회가 따로 운영되고 있었고, 일본 소아 알레르기 회원만이 약 1,000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 알레르기 학술대회의 소아과 분야에서는 젊었던 Ikura선생님의 발표가 눈에 뛰게 활발했습니다.
일본 교도 컨벤션 센터에서 학회 참석 후 우리 소아과 선생님들만 Kawasaki 질환을 처음 일본 알레르기 학회 발표하셨고 이 질환을 찾으신 Kawasaki 선생님이 근무하시는 시립병원을 견학하고 이어서, 고 Ikura 선생님이 계신 일본 국립 소아병원을 견학하기 위해 동경으로 가는 고속 열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성인들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소아들만의 알레르기 질환에 대한 연구 모임의 필요성을 논의하게 되었지요.
1984년 한창 청년이셨던 고 Ikura 선생의 클리닉과 연구시설은 그 당시 우리나라 어느 대학 알레르기 분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높은 수준의 장비와 시설로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어 우리 일행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움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일본학회와 병원 견학에서 돌아 온 후 그 당시 비교적 활발한 학술 모임이었던 대한 알레르기 학회 내의 서울 지회 모임에서 일본 소아천식의 근황에 대해 발표하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백병원 앞에 “파인힐”이라는 양식집에서 손근찬, 이기영, 이상일 교수님과 제가 모여 소아 알레르기 연구회 창립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았는데, 혹시 대한 알레르기 학회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던 내과 선생님들과 특히, 초대 대한 알레르기학회 회장님이시면서 창립자이신 고 강석영 교수님이 섭섭해 하실까 염려하며 소아알레르기 호흡기 연구회에 창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게 되었고, 1987년 봄 국립의료원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초대 회장에 손근찬 교수님으로 하면서 26명이 모인 가운데 드디어 창립총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1987년 소아 알레르기 호흡기연구회 창립 심포지움을 개최하였는데 고 강석영 대한 알레르기 학회장님께서 참석하시어 분가하는 연구회에 금일봉을 주셔서 다행스럽고 감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1992년 호주 Pearth에서 개최된 아시아 소아과 학회참석 때 호주 Pearth에 있는 마가렛드병원 소아 알레르기분야에서는 6개월 된 소아에게 폐기능 측정을 시행하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천식으로 사망한 환자가 기증한 집과 재산으로 천식 재단 (Asthma Foundation)이 조그마한 개인 주택에서 천식환자들을 위한 증상관리 지침서등 소책자를 나누워 주고 교육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1991년 4월 드디어 소아 알레르기(Reviews in Pediatric Allergy)학술지가 심포지움 연제들을 모아 출간되었고 그 후 1992년에도 같은 형식으로 두 번째 출판되었다.
1993년 이기영 교수님이 학회장님이 되시면서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투고 요령(투고 규정)을 만들고, 처음으로 현재와 같은 학술지 이름으로 학술지가 발행되었다. 1993년 만해도 학회의 재정이 빈약했고 학술지 만드는 간행위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은 전혀 없었고 최소의 식사비용을 청구 할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 회원 수가 많지 않으니까 원고 투고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술대회 거의 임박해서 들어온 원고를 교정 볼 시간도 촉박하였다. 지금처럼 e-mail로 주고받던 상항도 아니어서 부득이 간행위원들이 모여서 교정을 보고 논문심사를 했었는데 늦게까지 식당에 앉아서 교정볼 수 있게 자리를 허락하는 식당도 여의치 않아서 퇴근길에 마트에서 대충 떡볶기, 김밥 등을 사가지고 밤늦게까지 교정을 볼 수 있었던 편복양 교수 집에 모여 같이 식사하며, 교정을 보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웃으면서 기억할 수 있는 정겨운 추억입니다.
그뿐이랴 처음 학회지 출판을 당시 대한 알레르기 학회지를 발간하던 삼두문화사라는 을지로에 있는 작은 인쇄소에서 출판하였는데 촉박한 원고수급과 출판으로 학회 당일 아침에서야 학회지가 인쇄되어 나오게 되는 긴박한 일이 발생하여 학회장소로 학회지를 오토바이가 학회시간에 겨우 맞추어 도착되는 해프닝도 있어 마음 졸였던 잊지 못 할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학회지에 오타도 많았고 이제야 실토하지만 학회 회원들에게 그리고 우리 학회지를 보셨든 분들께 심심한 사죄를 드리고 싶다.
그 후 훌륭하신 간행 이사들과 집행진의 노고로 지난 20년간 소아 알레르기 호흡기분야에 많은 책이 출판되었고 주옥같은 수많은 논문이 발간되었음을 보며 참으로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학회이름으로 책을 발간한다는 것은 여러 편집진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처음 천식 치료 가이드라인이 학회지에 발표될 때에도 천식 치료 가이드라인에 대한 의견 조율(consensus)을 하기위해 모임을 소집하면 일사불란하게 모두 참석하는 열의가 있었고 이로 인해 소아천식 치료 가이드라인이 처음 발표되었다. 그 후 두 번째 소책자로 발간된 천식 지료 가이드라인은 많은 소아과 개원의들도 널리 이용된 소아천식 진료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알레르기를 이기는 101가지 지혜”란 책을 낼 때도 많은 교수님들이 환자 진료에 시달리면서도 주말인 토․일요일을 모두 반납하고도 불평하는 이 없이 마치 창고 같은 열악한 환경에 모여 칼국수로 식사를 때우고, 같이 한 줄 한줄 교정하고 의논하며 다듬었던 시간들이 있은 후에 책이라는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모두 즐거운 추억이지만, 우리 회원 특히 편집진들이 모두 착하고, 성실하며 어떤 교수님은 소처럼, 어떤 교수님은 재치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책 이름을 지으셨고, 모두 학회 일을 내일처럼, 한 가족의 일처럼 일사분란하게 수고하신 덕분이었음은 꼭 기록에 남기고 싶습니다. 그 후에 출판된 주옥같은 “소아알레르기 호흡기학” 교과서 등 참으로 많은 노고에 감사하며, 이런 성실한 결속력이 소아알레르기 호흡기 학회가 이렇게 어느 분과학회 보다도 눈부신 발전을 한 이유였음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2000년 일본 소아알레르기 학회 초청으로 새로 지은 동경 컨벤션 센터에 참석 했을 때 일본 소아알레르기 회원이 약 3,000명에 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지난 20여 년 간 알레르기 호흡기 환자의 증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0세가 되는 우리 학회 회원수가 26명에서 1,300여명에 이른다고 하니 학회가 얼마나 눈부신 발전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학회지가 논문 내용면에서도 충실할 뿐만 아니라. 이번에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가 되었다니 너무나 축하할 일이고, 그 동안의 편집진에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얼마나 수고 많이 하셨는지 회원 여러분과 후학들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소아알레르기 호흡기 학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원하며, 이 분야의 질환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이 행복한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2007년 2월
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 Web Museum 개설에.
대단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Web Museum을 우리말로 바꾸려면 ‘웹 박물관’이라 불러야 되겠지요. 웬 박물관? 선뜻 와 닿지 않습니다. 박물관하면 원가 모르게 고리타분한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주위에서 낡은 물건을 가리켜 ‘박물관에나 갈 물건’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던 세대라 그런가도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다 보면 당시에는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오래된 낡은 물건이 보물이 되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새삼 느끼고 또 소중하게 여겨지는 경험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보물이 될 자료나 물건을 모아 놓는 곳이 박물관입니다. 학회를 세우고 운영하고 또 무엇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고민하고 의견을 내고 했던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이 돌이켜보면 대단한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됩니다. 형태가 있는 물건들은 어찌 보면 모으기 쉽지만 생각들은 형태가 없어 더 쉽게 버려져 모으기가 참 어렵습니다. 참 아까운 생각들이 말입니다. 생각에는 좋은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의 앞날에는 모두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어 어느 하나도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많습니다. 개인의 욕심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자신보다는 환자와 학회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이 담겨 있는 생각도 있습니다. 모습이 없는 이 아까운 생각들을 기록해 웹 박물관에 보관되었으면 합니다. 다듬어져 만들어진 책자나 물건도 중요한 기록이 되겠지만 학회일로 서로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회의록은 웹 박물관에 더없이 귀한 기록물이 될 것입니다.
웹 박물관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편복양 이사장님에게 전해 듣고는 벅찬 감격에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축하하고 또 고맙고 또 자랑스럽습니다. 꺼지지 않고 오래오래 관리되어 후학들에게 좋은 자료를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2년 5월 12일
서함 이상일
대한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 창립25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을 회원여러분과 함께 기쁘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우리 학회가 앞으로도 활발하게 의욕적으로 그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일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더욱 기대가 됩니다.
26명으로 시작하였던 우리 학회가 오늘과 같이 크게 발전한 것은 역대회장, 이사장, 각부의 이사와 위원들의 노고, 열정 그리고 희생으로, 또한 여러 회원의 협조와 화합으로 이루어 낸 것으로 여겨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한천식알레르기학회가 1972년11월30일 58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슬 때 소아과의사가 3분(문형로, 김종진, 손근찬)뿐이었습니다. 마침 저는 국립중앙의료원에 있으면서 노르웨이Oslo대학 소아병원 천식알레르기센타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 왔을 때였습니다. 당시 의사들에게 알레르기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에 이를 알리려고 소아과학회에서 그리고 의과대학 학생강의와 의사회연수교육에도 요청이 있을 때는 마다하지 않고 했으며 노력하였습니다.
차츰 소아과의사들의 천식알레르기학회에 참여하는 수가 많아졌으며 1980년에는 이기영교수가 일본 기타사토(北里)대학에서 연수후 귀국하여 적극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천식알레르기학회에서 학술토의를 하면서 소아과의사들만의 모임이 따로 있어야 하겠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며 이상일교수가 UCLA에서 소아알레르기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고 몇분과 함께 소아알레르기의 밑거름이 되어 달라는 간청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987년4월17일 국립중앙의료원 스칸디나비안클럽에서 대한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의 창립총회가 있었으며 이어 6월20일 첫 학술대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하였으나 운영에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알레르기에 대해 모르는 의사가 의외로 많고 회원이 젊었으며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젊다는 것이 오히려 강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과의 allergist들이 좋지않은 눈으로 보고 시기하기도 했습니다. 더 어려웠던 것은 우리 회원이면서도 학회운영에 반대하고 비협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학회운영에 있어서 우리학회는 회원간의 화합을 중하게 여겼습니다. 대학이나 병원간에 차이를 두지 않고 모두 참여토록 했으며 서울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적극 참여토록 했습니다. 또한 젊은 의사들에게도 기회를 주었으며 개원의사들에게도 참여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우리학회는 창립하자마자 집담회를 일찍 시작하였으며 학회지를 발간하였고 색인집을 편집하였습니다. 회원들이 자주 만났으며 날이 갈 수록 학회활성화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회원 수가 급증하여 소아과학회내에서도 알레르기 호흡기를 전공하는 회원이 많아졌습니다. 또한 대한천식알레르기학회에서도 우리학회회원의 참여가 많고 중추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계속해서 우리학회는 회원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외국에서 연수를 하는 회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연구논문 발표도 많으며 우수한 논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국제학회도 개최한 경험도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 받는 학회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만하지 맙시다. 그런 분위기를 걱정합니다. 25주년을 맞는 우리 학회가 이제부터 제대로 발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한소아알레르기호흡기학회창립25주년을 맞게 된 것을 다시금 축하하며 학회의 무궁한 발전과 하나님의 축복이 회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5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