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면서 가만히 생각 해 보니 소아알레르기연구회를 만들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고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를 창설했던 때도 불과 며칠 안 된 것 같은 데 벌써 20년이 되었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위의 두 단체를 만들 때 깊이 관여를 한 한 사람으로서 설립 당시의 배경이나 여건, 학회를 만들게 된 동기 등, 필자가 알고 있는 내용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술함으로서 우리 학회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역사를 잃어버린 국민은 죽은 국민이라고 들 말한다. 역사란 그 나라, 그 기구 또는 그 조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옛 우리선조들이 세웠던 나라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몇 가지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왕릉 하나를 발굴한 뒤에는 역사를 다시 고쳐서 써야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이렇게 하다가는 우리나라 역사를 몇 번이나 더 새로 고쳐서 써야 될까?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하는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 이조시대에 들어오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과거의 기록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조시대에 발간된 역사서는 처음 만들 때 몇 벌을 복사해서 전국각지에 분산보관 했고 군인들을 상주시켜 문서의 보관에 철저를 기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불과 몇 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학회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참 잘 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역사란 잘 기록해서 보관하지 않으면 ‘증발’ 해 버리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1. 나의 반대로 창설이 늦어진 소아알레르기연구회

당시 알레르기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이 모여서 학술적인 지식을 서로 교류하거나 친선을 도모하던 장소는 대한알레르기학회 한 곳 뿐이었다. 물론 대한소아과학회는 있었지만 소아의 알레르기만을 연구하는 별도의 모임은 없었던 시기였다. 하루는 대한알레르기학회의 모임이 있던 날 손근찬교수님이 필자에게 “우리도 소아알레르기를 연구하는 모임을 하나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의향을 물었다. 필자는 “지금 현재 상태에서 그런 모임을 만들기는 좀 이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대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한참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동일한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도 필자는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피력하였다. 그 뒤 또다시 한 참이 지난 뒤 창립의사를 밝히셨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더 거절하기는 어려웠고 또 그동안 소아 알레르기를 연구하겠다는 의사들도 많이 늘어났으므로 소아과의사들로 구성 된 알레르기 모임을 하나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손교수님의 제안에 동의하였고 드디어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창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필자가 왜 연구회를 창립하는데 반대를 하였을까?. 당시 알레르기를 전공하는 의사들은 모두가 대한알레르기학회의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회원의 수도 많지 않았고 모임에 열성적인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어느 해인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대한알레르기학회에서 송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송년회를 보통날 개최했다가는 그나마 참석자가 더 적을 것 같아서 서울대학교에서 집담회가 끝난 뒤에 그곳 교수식당에서 개최하게 되었는데 학회장에서 누차에 걸쳐서 “송년회에 참석을 해 달라”고 몇 차례나 안내방송을 했으나 실제로 참석한 회원의 수는 단 5명에 불과했다. 강석영회장님, 이상용부회장님, 손근찬교수님, 김유영총무님 그리고 필자가 참석자의 전부였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요즘의 송년회와 비교 해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이런 상황 하에서 또 하나의 모임을 만들면 양쪽 모임 모두가 더 취약 해 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알레르기학회 회장이셨던 고 강석영 교수님도 우리가 딴 살림을 차리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하고 계셨다. 당시 대한알레르기학회에 참석하는 회원들 중 소아과 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필자가 연구회를 만드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연구회의 발족이 몇 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2. 회장을 하라는데 극구 사양했던 연구회 회장직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발족한 뒤 손교수님이 초대 회장에 취임하셨고 2대 회장으로는 정우갑 교수님이 수고를 하셨다. 그리고 3대 회장을 뽑을 때이었다. 총회가 끝나갈 무렵 회장이 차기회장을 뽑는 5명의 전형위원들을 구성해서 저녁을 먹던 식당 밖으로 나가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잘 모르겠으나 누가 와서 필자보고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전달했다.

필자가 나가서 보니 5분의 전형위원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가 나가자 “이 교수가 회장을 맡아 주셔야 되겠습니다”. 필자는 회장직을 맡기가 싫었다. 그래서 “못하겠습니다”라고 즉석에서 거절하였다. “왜요?”. 당연히 거절하는 이유를 물어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첫째로 저는 현재 우리 교실에서 research를 하기 위한 종자돈을 모금하고 있어서 다른데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그랬다. 필자는 앞으로는 research를 통해서 얻은 결과를 논문으로 쓰지 않으면 버텨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research를 하기 위한 ‘종자돈’을 모금하고 있었다. 주임교수라는 빽을 등에 업고 개원이 잘되고 교실에 관심을 지닌 교실동창들을 상대로 모금을 하고 있었다. 돈을 내라고 집에 까지 찾아갔던 일도 있었다. 그 결과 당시 돈으로 2억이 넘는 돈을 모을 수가 있었다. 연구비의 분배는 연구비 타기를 희망하는 교수들로부터 연구계획서를 받고 연구하려는 내용을 공개발표 시키면서 소아과 교수 5명, 타과 교수 5명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여 연구비를 차등지급하였다. 이런 제도는 동창들의 자율적인 기부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둘째로는 제가 방금 대한알레르기학회 초대 이사장을 끝냈는데 이보다 2등급이나 내려간 연구회장을 맡으라니 이건 곤란한 일이 아닙니까?. 사실 이 말은 너무 방자한 생각에서 나온 말임에 틀림이 없었다. 우리 소아과 의사들의 학술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면 등급이 내려간들 무엇이 문제로 되겠는가?. 따라서 둘째 이유는 하지 않겠다는 그야말로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위에서 필자가 ‘초대’ 알레르기학회 이사장직을 역임 했다는 것은 필자 대에 와서 학회가 회장에서 이사장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승계되었던 것이지 필자가 대한알레르기학회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둔다.

또 2단계가 강등된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에는 정(正)학회가 있고 다음으로는 준(準)학회가 있다. 그다음 단계가 연구회이다. 현재 어떤 학술단체가 ‘정학회’로 되려고 해도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학회가 되기를 원하는 준 학회는 무수히 많아서 이를 다 정학회로 올려 주다가는 정학회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정학회의 수는 아직도 30개 전후가 되지 않나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소아과학회와 대한알레르기학회(후에 대한천식 및 알레르기 학회로 명칭변경)는 정학회이고 현재의 대한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는 준 학회이며 당시의 연구회는 임의단체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즉, 연구회는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몇 명만 모여도 만들 수가 있고 어느 누구의 승인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학술지를 꼬박꼬박 만들지 않아도 되는 대신 준 학회나 정 학회는 대한 의학회의 승인을 받고 학술지도 정기적으로 발간해야만 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대개는 연구회로 시작해서 준 학회 그리고 정학회로 up grade해 나가는 것이 관례이다.

3. 다른 일은 안 하고 ‘결제’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수락한 회장직

필자가 보기에 회장을 뽑는 전형위원회에서 회장직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 해 보였다. 거기 모인 분들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 해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몇 번이나 고사를 했는데도 필자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할 수 없이 회장을 맡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었다. 그것은 “회장이 되더라도 active하게 일은 하지 않겠다. 학회에서 올라오는 서류를 결재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엉터리 같은 조건을 그 분들은 받아 들였다. 대단히 고마운 분들이다.

또 회의장에서 새로 선출된 회장이 인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일은 하지 않고 결재만 하겠다.”고 했는데도 청중이 박수를 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마도 알레르기를 하는 분들은 심성이 착한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런 인사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필자 같았으면 “그렇게 회장을 하기 싫다면 당장 고만둬라!”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어야 옳지 않았을까?. 필자는 너무 솔직해서 항상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는 성격이라서 그렇게 말했던 것 이었다. 하여튼 필자가 잘 못 했다는 것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

4. 연구회를 ‘준학회(準學會)’로 승격시키고 학회명칭도 바꿨다

필자가 “일은 하지 않고 서류에 결재만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필자의 성격상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체질이라서 어떤 일이든 벌려야만 하였다. 또 그 때는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혈기도 왕성했던 때였다.

필자는 제일 먼저 ‘연구회’라는 제도부터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연구회란 학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수순에 불과하다. 연구회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우리 ‘기관’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연구회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몇 명만 모이면 누구나 만들 수가 있는 대신 의무나 책임은 없다. 일본에는 ‘베로텍 연구회’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그 명칭은 어떻게 붙일 것인가?. 얼핏 생각하기에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로 할 것인지 아니면 ‘소아알레르기 및 임상면역학회’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만약 후자를 택했다가는 미구에 ‘소아호흡기학회’가 창립될 것이 뻔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감투’를 쓰려는 욕망이 있다. 따라서 틈만 보이면 새로운 학회를 만들려고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의 소아알레르기 호흡기학회를 둘로 나누었다고 상상 해 보라. 학문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이 되어 있어서 학문적 발전은 이룰 수가 없고 감투자리만 많이 늘어 날 것이다. 또 회원들은 회비를 2배로 내야하고 논문도 약간 바꿔서 2개로 나누어 양쪽 학회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양 쪽 학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알레르기에 호흡기를 붙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첨부문서 참조요망. 이 첨부문서는 당시 회원들에게 보냈던 공문서들이다). 임상면역학회는 본래 이 분야를 전공하는 분도 많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로 보아 그런 학회를 당장 만들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한천식 및 알레르기학회도 처음에는 알레르기학회였으나 내과에서 천식연구회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선발주자가 이름을 바꿨던 것이다.

5. 유관학회의 승인을 얻어내기가 까다로웠던 학회명칭

학회를 만드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 또 하나가 있다. 소위 유관단체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소아청소년과’가 표류하고 있는 것도 내과의 반대 때문인데 내과가 바로 유관단체이기 때문이다.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의 유관단체로 되는 과는 내과, 이비인후과 그리고 피부과이다. 이들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아야만 학회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위에 열거한 학회에서 중견구룹에 속하는 분들이 모두 대한알레르기학회에서 항상 만나는 분들이라서 이 분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큰 어려움이 없이 승인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주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 분들이 속한 학회에서 반대의사를 내는 분들이 있었으나 무마했다고 한다.

6. 학술지 간행의 어려움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나 ISSN을 받아 내는 일은 당시 우리학회의 열성적인 회원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달성할 수가 있었다.

학회라는 명칭이 붙으면 정기간행물을 발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학술지를 발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제일 급한 것은 논문을 끌어 모으는 일이었다. 논문은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학의 교수님들로부터 나오는데 소속 대학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 싣지 않으면 진급심사에서 인정하지 않는 경우, 소아과학회 학술지, 알레르기학회 학술지,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 학술지로 논문을 나누어 내다보니까 우리처럼 작은 학회에서는 논문을 얻기가 어려워 집필자들에게 전화도 걸고 직접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발간할 날자는 얼마 남지 않아 간행위원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간행위원 중 한분이 자신의 아파트로 간행위원들을 초대해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학술지를 만들 정도로 고생들을 많이 하셨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7.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

알레르기학회 회장이시었던 고 강석영 교수님이 필자보고 책을 같이 만들자고 하셨는데 이 잭은 의사용이 아니라 환자가 보아야 될 책이었다. 책의 이름은 ‘4천만의 알레르기’라고 이름까지 제시하셨다. 작고하신 후 필자가 이사장 시절에 그 유지를 받들어 동일한 이름으로 책을 발간하였다. 그런데 집필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편집과정에서 고생이 많았다.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환자용 책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발간목적은 물론 환자의 부모들에게 병에 대한 상식을 높여 주자는 목적도 있었으나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소아과와 이비인후과의 차이점, 어린 아이들이 아프면 소아과에 가야 하는 이유 등 다른 과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집필자의 수를 줄여 보았으나 역시 저자가 많았던지 편집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8. ‘강습회’를 처음으로 개최하다

필자가 일본에 갔을 때 보니까 의사들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필자도 참가 해 보니까 참으로 유익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알레르기학회 이사장 때 처음으로 정기적인 강습회를 시작하였다. 강습회는 일본식 명칭이고 지금은 보수교육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학회에서도 정기 보수교육을 시작하였다. 특히 학회 측에서 볼 때 이는 돈이 남는 장사였다. 예산을 집행하기가 어려웠던 당시 짭짤했던 수입은 학회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거의 모든 학회에서 보수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각 대학의 교실 단위로도 실시하고 있다. 돈 맛을 보니까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우선 너무 많은 곳에서 비슷한 제목으로 강좌를 하기 때문에 참가자가 어느 것을 들어야 할지 선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강의의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어서 개원의들에게는 개원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필자가 실제적으로 개원을 해 보면서 절실하게 느꼈던 점이다. 특히 소아과처럼 특별한 술기가 없는 과의 특성상 개원의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9. 학회 사무실이 있었으면

학회 사무실이 없으면 이사장이 바뀔 때마다 거창한 이삿짐(주로 서류뭉치)을 싸들고 이사를 다녀야 하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흔히는 이사장이 있는 대학 쪽으로 이사를 가는데 요즘은 교수들의 수가 많아서 남는 방이 없어 이사장과 사무원이 한방을 쓰기도 한다. 피차에 불편할 것이다. 이사장이 다른 데는 돈을 많이 쓰면서 차기 이사장에게 ‘남은 돈’을 이월하면서 “대과 없이 끝냈다”고 말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 다소 아껴서 쓰더라도 돈을 남겨서 이를 모아 방 한 칸이라도 장만하는 것은 어떨까? 일반인들이 주택 구입용 통장을 따로 만들고 가계대출을 받듯이 말이다. 오피스텔은 일반 아파트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다. 소아과학회나 천식 및 알레르기학회에서 사무실을 구입한 것도 과히 오래된 일은 아니며 소아과학회에서는 이번에 방 한 개를 더 구입한바가 있다.

10. 무궁한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우리 학회도 이제 20살 청년기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2007년 1월 18일